건조 및 출항
타이타닉호는 영국의 하랜드 앤 울프 조선소에서 건조되었으며, 당시 세계 최대의 여객선이었습니다. 1912년 4월 10일, 영국 사우샘프턴에서 E.J. 스미스 선장의 지휘 하에 2,224명의 승객과 승무원을 태우고 첫 항해를 시작했습니다. 목적지는 미국 뉴욕이었으며, 프랑스 셰르부르와 아일랜드 퀸즈타운에 기항한 후 대서양 횡단을 시작했습니다.빙산 충돌
1912년 4월 14일 일요일 밤 11시 40분경, 타이타닉호는 뉴펀들랜드 남동쪽 약 600km 지점에서 빙산과 충돌했습니다. 당시 바다가 unusually calm하여 빙산 식별이 어려웠고, 망루의 쌍안경이 없었던 것도 문제였습니다. 1등 항해사 윌리엄 머독은 충돌을 피하기 위해 조치를 취했지만, 배가 너무 가까이 있어 충돌을 피할 수 없었습니다.침몰 과정
빙산과의 충돌로 타이타닉호의 우현 측면이 찢어져 최소 5개의 수밀격벽이 파손되었습니다. 토마스 앤드루스 수석 설계자는 배의 앞쪽 격실들이 물에 잠기면서 불가피하게 침몰할 것이라고 판단했습니다. 스미스 선장은 배수 펌프로 해수를 빼내려 했지만 효과가 없었고, 0시 5분에 조난 신호를 발신했습니다.침몰이 진행되면서 선수가 점점 더 깊이 물에 잠겼고, 선미는 수면 위로 올라갔습니다. 4월 15일 오전 2시 18분경, 전기가 완전히 끊겼고 선체가 두 동강 나기 시작했습니다.마침내 2시 20분, 타이타닉호는 완전히 침몰했습니다.
구조 작업
가장 가까이 있던 SS 캘리포니안호는 무선 통신사가 취침 중이어서 조난 신호를 받지 못했습니다. 대신 RMS 카르파티아호가 조난 신호에 응답하여 전속력으로 사고 현장으로 향했지만, 타이타닉호가 침몰한 지 약 1시간 30분 후인 3시 55분에야 도착했습니다. 카르파티아호는 4월 15일 오전 9시 15분까지 710명의 생존자를 모두 구조했습니다.사상자 및 영향
이 사고로 1,500명 이상이 사망했으며, 이는 역사상 가장 치명적인 평시 해양 참사 중 하나가 되었습니다. 특히 3등 승객들의 사망률이 높았는데, 약 710명 중 174명만이 생존했습니다.이 재난은 전 세계에 충격을 주었고, 구명정 부족, 느슨한 규정, 대피 과정에서의 불평등한 대우 등에 대한 광범위한 분노를 불러일으켰습니다. 이로 인해 해양 안전 규정에 대한 전면적인 변화가 이루어졌고, 1914년 국제 해상인명안전협약(SOLAS)이 제정되는 계기가 되었습니다.